경은사 목조문수보살좌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294호) 해석 > 풍경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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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은사 목조문수보살좌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294호)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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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택 작성일18-02-10 11:42 조회1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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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물은 경은사의 문수보살목조좌상 에 대한 대중적인 해석과 고찰에 대해 가볍게 적고 있습니다.

인터넷 에서 검색을 통해 나오는 설명의 용어가 어려워 이해하기 쉽게 풀이하였고 문수보살목조좌상의 구체적인 시대적 배경과 필자 본인이 나름대로 조사한 바를 담고 있으니 부족한 부분은 댓글로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해석

현대인의 가장 쉽게 지식과 정보를 얻은 곳은 당연 인터넷 이라고 많은 이들이 생각한다. 그래서 가장 쉽게 해당 유물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얻는다

당장 오늘의 뉴스를 검색하더라도 스마트 폰을 이용하여 손쉽게 소식을 접하듯이 말이다.

제천 경은사엔 대한민국에서도 보기 드문 유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문수보살목조좌상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94호) 이다. 먼저 과연 문수보살목조좌상 은 왜 무수보살목조좌상 일까? 에 대한 궁금증과 의문이 든다.

명칭을 살펴보면 문수보살목조좌상, '목조' 는 나무로 만들었음을 의미 한다 다음 '좌상' 앉아있는 모양의 그림이나조각 을 의미한다. (반대로 서있는 조각이나 그림은 '입상' 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나무로 만든 앉아있는 모양의 조각' 이라는 말이 된다.

그럼 누가 앉아있는 모습을 나무로 만들었을까? 자연스럽게 문수보살의 앉아있는 모습을 나무로 만들었다. 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문수보살... 과연 누구일까 이런 의문이 드는 순간부터가 그 의미와 일맥상통한다고 보여 진다. 필자는 한 낯 인터넷상에서 자료를 찾으면서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무한한 의구심과 깨달음으로 어디서부터가 가르침의 시작인지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자신이 얼마나 불교에 대해 무지 했는지 아주 금방 알게 되었다.

2.보살의 의미

현재의 불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대승불교' 와 '소승불교' 가 그것인데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문수보살목조좌상 은 대승불교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간단히 생각하면 현재 중국,한국,일본,티베트 에서 발전한 것이 대승불교라고 보면 되는데, 여기서 보살의 의미를 살펴보면

'보살' 은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 '보디사트바' 가 어원으로 한문으로 菩提薩埵(보리살타)라고 한다. 대승불교에서의 보살이란 의미는 현대에서 생각하는 '생활불교'라는 의미에 원천이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단순히 깨달음을 얻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수행하는 이들을 보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데 이후 불교에서 수행하는 신도를 보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보살은 수행하는 자라는 의미만 있는 것도 아니고 부처보다 등급이 낮은 존재도 아니며 많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대중에게 뛰어든 존재들이다 문수보살도 불법을 통하여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부처에서 보살로 중생에게 내려왔다고 한다. 즉 보살은 실제적으로 많은 중생들에게 깨달음을 나눠주며 그들의 헤아리고 소통하는 존재들이다. 이것이 현대 생활불교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3. 문수보살좌상

그럼 보살의 의미는 알았는데 도대체 많은 보살 중에 문수보살은 어떤 역할을 하고 무엇을 한 보살인가 에 대한 실체적인 궁금증이 든다.

문수보살을 검색을 하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문수보살은 부처님의 반야(최상의 지혜를 뜻한다.) 의 도리를 선향 한 이로 '반야경' 을 편찬하였으며 지덕과 체덕을 맡아 석가모니불의 교화를 돕기 위해 나타난 보살이다. 사자와 공작을 타고 다니는 것은 용맹한 지혜를 나타내는 것이고 오른손엔 칼을 든 것은 일체중생의 번뇌를 끊는다는 것과 오른손에 청련화를 쥐고 있는 것은 일체 여래의 지혜와 무상의 지덕을 맡아 제법에 물들지 않아 마음이 머무르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머리의 다섯 개 의 상토는 대일여래의 조리를 표현한 것이다.

(라고 나오는데 필자는 여기까지만 해도 검색되는 자료에 대해서 다 이해를 하지 못하였으므로 문수보살이 어떤 보살인지에 대한 설명만을 적었다.)

즉 완벽한 지혜를 갖추고 중생들이 잡생각 못하게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해서 반야경을 통해 끝없는 지혜로 깨달음을 얻게 해주는 보살이라는 의미로 해석을 하였다.

이런 지엄하고 무한한 지혜를 갖추신 보살을 누가 왜 만들었을까?

문수보살목조좌상을 개금불사 하는 과정에서 조성녹기1매가 발견되었는데 말미에

崇禎九年丙子十二月二十九日化主金春生伏願 (숭정구년병자십이월이십구일화주김춘생복원) 이라는 글과 복장기에 수화승 승일 이라는 말이 조성시기와 조성인물을 알려주고 있는데 이글을 풀이해보자면 숭정 구년은 병자년이고 이해 음력 12월 29일에 화주는 김춘생 이고 '승일'스님이 조성하였다. 라는 말이 된다. 숭정 9년은 명나라의 연호이므로 이때는 조선 제 16대 인조 즉위 14년 다시 말해 1636년 음력 12월29일 되는 때이다.

이날 무슨 일이 있었을까? 조선왕조실록 에서 기록을 찾아보았다. 한마디로 충격 적이었다.

이때는 병자호란이 일어난 때다.

조선왕조실록 에서 이 시기의 기사를 살펴보면

인조 14년 12월 14일

적병이 송도를 지나자 파천을 논의,신주와 빈궁을 강도로 가게 하다.

- 개성 유수가 치계하여 적병이 이미 송도를 지났다고 알려오자. 마침내 파천하는 의논을 정하였다. 예방승지 한흥일 에게 명하여 종묘 사직의 신주와 빈궁을 받들고 먼저 강도로 향하게 하였다. 김경징을 검찰사로 이민구를 부검찰사로 삼아 빈궁의 행차를 배행하며 호위하게 하였다.

라고 나오는데, 인조는 식솔들을 먼저 강도 즉 지금의 강화도로 피신시키면서 정세는 매우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수보살목조좌상이 조성된 당일의 기사를 살펴보면,

인조 14년 12월 29일 3번째 기사

김류의 지휘로 북문 밖에 진을 친 군대가 크게 패하다

- 이날 북문 밖으로 출병하여 평지에 진을 쳤는데 적이 상대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 무렵 체찰사 김류가 성위에서 군사를 거두어 성으로 올라오라고 전령하였다.

그때 갑자기 적이 뒤에서 엄습하여 별장 신성립등 8명이 모두 죽고 사졸도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김류가 군사를 전복시키고 일을 그르친 것으로 대죄하니, 상이 위유 하였다.

라고 나온다. 이때는 이미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대피하여 청과 대치하고 있었던 상황으로 전세가 매우 불리하게 흐르고 있었으며 이후 한 달여간 대치하다 '삼전도의 굴욕' 으로 병자호란은 마무리 짖게 된다.

문수보살목조좌상 의 복장기에 나오는 '승일'스님,

이 스님은 17세기의 대표적인 조선의 조각승이다. 그러나 이 스님의 대표작들이라고 할 수 있는 불상들은 1650년대나 되서야 빛을 발하게 된다. 이 문수보살목조좌상이 조성된 시기는 1636년, 문화재청의 자료를 보면 문화재로 등재된 승일스님의 작품의 조성년도는

아무리 빨라야 1651년, 다시 말해 문수보살목조좌상은 승일스님의 유년 또는 청년 시절에 조성한 불상이고 이때 이미 불상을 조성할 만큼의 실력이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으로 추측이 된다. 1636년에 만들어진 현재 남아있는 '승일' 스님의 불상은 문수보살목조좌상 이 유일하다는 것이 된다.

이 승일스님이 어떤 스님일까에 대한 의문이 남아있다.

그러나 생몰년도, 대표작 외에는 별다른 자료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라가 한참 혼란할 시기에 훌륭한 불상을 조성하여 많은 중생들의 마음을 위로한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실록에는 당시 승려의 나라를 위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인조 14년 12월 21일 4번째 기사에는

승려 삼인이 소와 말을 바치니 호궤하게하다.

- 개원사 승려 삼인이 말과 소를 한 마리씩 바쳤는데, 상이 호군하라고 명하였다.

인조 14년 12월 24일 7번째 기사

승려 호열이 청밀을 바치다

- 승려 호열이 청밀을 바쳤다

라는 기사로 볼 때 당시의 시대상으로 보면 말과 소를 바쳤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고 한겨울에 채 익지 않은 청밀을 바친다는 것 또한 식량을 걱정한 승려의 마음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다.

문수보살목조좌상은 그리 크지 않은 좌상이다. 그러나 분명 이 문수보살목조좌상을 조성하면서 승일스님 또한 나라의 위기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국운이 기울어가는 당시 승일스님, 혜충스님, 도우스님은 어디서 이 문수보살목조좌상을 조성하면서 무슨 염원을 빌었던 것일까.

필자는 문수보살좌상의 사진을 보면서 어딘지 묘하게 슬퍼 보이기도 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4.개금

문수보살목조좌상의 복장기는 묵서와 주서 로 쓰여진 것이 1본 씩 존재한다. 묵서는 검은 글씨로, 주서는 붉은 글씨로 작성된 것인데, 주서로 작성된 복장기의 말미에 大韓光武十一年丁未四月初八日 라고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문수보살목조좌상의 개금 즉 불상에 금칠을 다시 하는 것을 대한광무십일년정미사월팔일 에 한 것으로 보여진다. 즉 대한광무십일년의 사월초파일 부처님 오신날에 금장을 다시하면서 주서로 복장기를 다시 쓴 것으로 보이는데 대단히 큰 행사였을 것이다. 이때는 고종이 즉위한지 44년째 되는 해 다시 말해 1907년이다. 이 해에는 고종이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일본에 의해 강제로 퇴위되는 대한제국사의 가장 치욕스러운 시기이다. 이날 ‘대한매일신보’ 는 부처님 오신날을 ‘석존탄신’ 이라는 제목으로 보도 되었다.

5. 결론

지금까지 간략하게 경은사의 봉안된 대지문수보살목조좌상 에 대하여 온라인상에 나와 있는 자료들을 정리해 보았다.

처음엔 개인적으로 궁금증과 의문이 들어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지만 너무도 방대한 지식에 정리하는 과정에서 알아갈수록 혼자 하기엔 너무도 방대하고 버거운 작업이라 자료화 하는 것은 엄두도 나질 않게 되었고,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신도들이 이해하기 쉽게 게시물로 작성해야겠다고 방향을 바꾸게 되고, 자료를 검색하고 찾아보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로 했지만 작성하고 나니 분량은 적었다. 읽기는 쉽지만 정작 문수보살목조좌상에 대한 정보나 자료는 국한되어 있고 그나마 직접 조성한 승일 스님에 대한 기록은 전무 하다 싶이 했다. 자연스럽게 문화재에 직접적인 자료수집 보다는 조성시기에 대한 배경을 주로 다루게 되었다.

모 사이트에는 문수보살목조좌상을 개인의 호지불로 조성을 했다. 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호지불 이란 여행이나 전쟁에 나갈 때 평소에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을 말하는데 크기가 매우 작은 것이 특징이다. 작은 것은 2cm 내외인데 경은사의 문수보살목조좌상은 30cm 정도니 이 좌상을 평소에 몸에 지니고 다니기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는 것이 필자의 사견이다. 하지만 가르침을 원하는 많은 불자를 위해 조성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 같다. 또 조성시대의 배경이 나라가 매우 혼란하고 위태로운 시기여서 대지문수보살의 무한한 지혜로 이 혼란을 구원하고자 했던 마음에서 조성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이 문수보살목조좌상은 현재까지 17세기 불교조각에서 한 계파를 담당하고 있는 승일 스님의 현존하는 시대적 첫 작품이라는 의미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무한한 지혜의 대지문수보살목조좌상이 봉안되어 있는 지혜의 도량 경은사에서 모든 신도님과 불자님들께 문수보살의 지혜가 깃들 기를 바라며 이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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